김순석 열사

김순석 열사

동지의 삶과 투쟁


–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. 그는 어려서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었습니다.

– 1970년 열아홉의 나이에 고향인 부산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. 금은세공 공장에 취업해 열심히 일했고 9년 뒤 그는 공장장이 되었습니다.

– 결혼도 하고 아들 김경남 군도 태어났습니다.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 그해 1980년 그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게 됩니다.

– 3년여의 투병생활을 거쳐 그는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. 송파구 마천동 집 옆에 자그마한 금은세공 작업장을 마련하고 반지, 목걸이 등을 열심히 만듭니다.

– 당시 물건 납품을 위해서는 남대문시장으로 직접 가야했습니다. 그러나 집 밖의 세상에서 그는 모든 턱에 가로막혔습니다. 차도를 건너기도, 화장실을 가기도 힘들었습니다. 수동휠체어를 탄 그를 보고 빈 택시는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습니다.

– 남대문 거래처 사장들은 장애인이 만든 것이라며 납품 단가를 깎고 또 깎았습니다, 어느 날인가는 도로의 턱과 육교 때문에 무단횡단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습니다.

–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세상의 커다란 벽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 몸부림치던 그는 1984년 9월 19일 서울 시장 앞으로 다섯 장의 빼곡한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합니다.

– “시장님,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.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.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”

– “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주었습니다.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습니다. 시장님…. 시내 어느곳을 다녀도 그놈의 턱과 부딪혀 씨름을 해야합니다. 또 저같은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은 어디 한군데라도 마련해 주셨습니까“

– 그의 꿈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과 함께 금은세공 공장을 운영하며 공동체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.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이동권과 사회적 냉대 속에 결국 사위어갔습니다.

– 그해 10월 정립회관에서 열린 제8회 전국지체부자유자대학생체전 개회식에서 장애인대학생으로 구성된 대학정립단이 김순석 열사의 모의관과 분향소를 차리고 위령제를 치렀습니다.

– 그들은 당시 행사에 참석한 교육부장관의 조문을 요구했습니다.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죽음으로 외쳤던 김순석 열사의 항거가 세상에 알려진 첫 투쟁이었습니다.

– 이동권과 노동권, 교육권 그 모든 생존의 문제를 짊어지고 먼저 떠난 김순석 열사.
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들을 이제 살아남은 이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힘차게 투쟁해야겠습니다.